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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능이 심장을 찾아와 메만지며 속삭였다.
이 여자와 있다간 죽는다.
너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해 이 여자와 떨어져야 한다.
너 스스로를 지키려면 이 여자를 죽여야 한다....
글쎄.. 하지만 실제로 본능이 이 남자에게 건넨 것은
앞선 문장처럼 구체적인 암시는 아니었을 것이다.
그러나 본능은 암시를 담은 아주 작은 씨앗을
남자의 심장과 뇌리 안에 강하게 박아넣었다.
몸 전체가 찰나의 순간만큼은 찌릿거리도록....
갑자기 무슨 생각이 들었을까.
난 얼른 설거지를 말끔이 끝내고 대충 반바지에 후리스를 주워입고
현관문을 열고 나섰다.
삐비빅 또르르르 삑
'하 저 XX 저 도어락. 스피커를 부시든가 해야지..'
차가운 밤공기에 다리털들이 바짝 섰다.
몸을 잔뜩 모은채 잰걸음으로 아파트 정문에 있는 편의점으로 향했다.
편의점 문을 열고 알바하시는 분께 물었다.
"안녕하세요~ 저 공책이나 연습장 같은게 있나요?"
"네 저기 마지막 매대 왼쪽 아래 가시면 있을거에요"
다행히 있었다. 하나를 잽싸게 주워 계산을 하고, 집으로 돌아왔다.
경박스런 도어락에게 또한번 저주를 퍼부으며 작은방으로 들어갔다.
징검다리를 건너듯이 바닥에 놓인 물건들을 피해
책상에 도착해 겨우 공책을 놓고 의자에 앉았다.
작은방은 3년째 쓰레기장 신세로 있다.
아기를 낳고 1년쯤 지났을 때,
와이프가 집에서 디퓨져사업을 한번 해보겠다며 열정을 보이길래,
사랑하는 아내를 위해 하고 싶은 거 해보라고, 시원스레 찬성하였다.
천만원 정도를 종자돈으로 사용했다. 처음에는 그럴듯하게 시장조사도 하고,
브랜드이름이 박힌 박스도 맞추고, 디퓨져병도 대량으로 구매하면서
일사천리로 일이 진행되는 듯 싶었지만, 차츰 본인의 상황이나 능력으론
일이 진행되기 힘들다는 것을 깨달았는지 현재까지 휴업상태다.
그렇게 사업을 준비하며 쌓인 짐이 작은 방을 식민지화 시키고 나니
어느새 유유상종 이것저것 잡동사니들도
함께 모여 쌓이게 되었고, 이렇게 쓰레기장처럼 되고 말았다.
세상 어지러운 책상 한가운데에 공책을 놓고,
책상 위를 돌아댕기던 네임펜을 주워들었다.
이미 마음 속에서 결정한듯.
공책의 표지에 서걱서걱 정자체로 제목을 적었다.
[싸 움 일 기]
이때 왜 갑자기 일기를 써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는지..
다른 이유는 아무리 생각해도 떠오르지 않았다.
오직 그럴듯한 한가지.
.. 바로 장대호의 회고록..
그랬다면 동기부여 지리네 진짜..
이 생각이 스스로 시덥잖았는지 입을 끌끌거렸다.
볼펜을 들고 아내와의 첫싸움을 상상해보려
눈을 가늘게 뜬 채 그녀와의 과거기억들을 있는 힘껏 헤짚어보기 시작했다.
죽이고 쓰는 것보다.
써놓은 것을 보다보면 죽일 이유가 더 분명해질 것 같으니까..
본능이 조용히 속삭였다.
' 주........윽........여.....'
.
.
.
.
.
.
.
[20년 전]
대학축제가 한창인 캠퍼스
밤이 되자 학과별로 만들어 놓은 주점들이 노란색 전구불을 하나 둘 밝혀
축제 마지막날의 밤 분위기를 돋구기 시작했다.
중앙광장에선 사회자의 진행아래 가요제가 시작되려는 듯 하고,
중앙동아리들은 각 동아리의 개성을 살려 이곳 저곳에서 직접 만든 굿즈를 팔거나
홍보물들 혹은 결과물들을 전시하는 방식으로 축제를 마지막까지 즐기고 있었다.
대학교에 입학하고 처음 맞이한 축제. 게다가 마지막 날인데..
동현이는 PC방에서 친구들과 스타크래프트를 열심히 하고 있다.
"야야~~ 나 본진 털린다 본진 털려!!"
"일단 입구부터 막고 있어봐!!"
" SCV good to sir!!"
"야야 일단 기지부터 띄워서 그냥 .. "
띠리리리링 띠리리리링
총 천연멜로디가 휴대폰에서 울리기 시작했다.
"야 나 GG 이거 못이겨.. 야 기수선배한테 전화왔다. 이제 우리 가야돼"
"네 여보세요? .. 네 형 공대 앞이요. 네 . 그리로 갈께요"
동현이는 선배에게 온 전화를 끊고 가방을 메며 찬수의 등을 양손으로 쳐댔다.
"야 가자. 걍 GG치고 인나"
잰 걸음으로 기수선배가 말해준 주점으로 향하는 동현이와 찬수.
이 둘은 2000년 파오후대학교 기계공학과에 함께 입학했다.
찬수는 현역은 아니었지만, 괜히 족보정리하다가 어색해지는게 싫다며
과동기들과 반말을 까며 친구로 지냈다.
둘 모두 만화를 좋아해서 함께 만화동아리에 가입했는데,
사실 만화가 좋다기보다... 기계공학과의 남녀비율에 환멸을 느꼈기 때문이다.
기계공학과는 여학우 비율은 이 한마디면 끝이다. 바로
[올림픽]
말 그대로 올림픽처럼 4년마다 여학우가 1명씩 들어온다는..
전형적인 남초집단인 것이다.
그러나 그 와중에도 신기하게 연애질을 시작한 같은 과 친구들을 보며
둘은 슬슬 배알이 꼴리기 시작했다.
"야... 기계과 구려.. X나 구려.. "
찬수가 물었다.
"왜?"
"걸... G i r l... 걸이 없잖아 걸이..."
테이블에는 계란말이 안주 한개에 비운
소주병 2병과 반쯤 남은 소주병 한개가 놓여있었다.
조금은 빨라진 찬수의 젓가락질을 느낀 동현이 서둘러 잔을 비우고 일갈했다!
"야 그 젓가락질 멈추지 못할까.. 안주가으으.. 몇 개 안남아서 아꼄 마"
찬수는 젓가락질을 잠깐 움찔하더니 원래부터 그럴려고 했다는 듯 계란말이 한개를 정확히 두 쪽으로 나누고, 한개를 들어 이거나 좀 드시라고
동현이의 입에 넣어주며 말했다.
"야 그나저나 넌 임마 얼굴이 그정도 반반하면 임마. 나같았으면..
아 XX 내 얼굴 생각하니까. 아 술맛 떨어지네.. "
동현이도 스스로 잘 생겼다는 것 정도는 알고 있었다.
"내가 잘 생기긴 했지... 야 야 .. 말을 다 들어.."
자화자찬에 분노한 찬수의 눈찌르기를 손날을 이용해 가까스로 막아내며 동현이는 말을 이어갔다.
"야... 문제는 우리가 아니고 바로 기계과가 문제야...
여기 올림픽이야.. 아테네에서 4년마다 한번씩
여자가 성화봉송해서 기계과까지 온다는 얘기가 있어..
그래서 말인데...
우리 동아리에 들어가자. 우리 맨날 만화방에 박혀 있잖아.
우리가 뭐 기타를 칠 줄 아냐.. 검도를 할 줄 아냐..
우리가 그래도 검지힘이랑 엄지 힘이 겁내 쎄잖아.
만화책 넘길 힘은 있잖아. 만화동아리에 들어가자 만화동아리"
찬수는 테이블에 팔짱을 하고 기댄 채로
열변을 토하는 동현이를 심각하게?
아니 한심하게? 쳐다보더니..
닭이 끼요옷~ 하는 느낌으로 말했다.
"오오 미친놈인가? "
남은 달걀말이를 젓가락으로 집어든 찬수는
달걀말이를 바로 입으로 입금시키고는
"그래 임마 형이 함께 한다. 가자 만화동아리!! "
그렇게 찬수는 생각없이 동현과 함께
만화동아리에 가입하게 되었다.
"기수형"
"어 어서 와라. 형들께 인사드리고.."
"10기 김동현, 박찬수 선배님들을 뵈옵니다!!"
동현이와 찬수는 왠일인지 축제술자리에 동석한
고학번 선배님들에게 오타쿠스러운 인사를
깍듯이 한 후 쭈뼛거리며 주점안으로 들어섰다.
그리고 들어서자마자 알 수 있었다. 왜 고학번 선배들이 술을 마시고 있는지.
그곳엔 설레이며 주점까지 온 보람. 빛나는 존재.
만화동아리의 존재 이유였던. 예린이가 있었다.
6화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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